황장엽 사건에 대한 분석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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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장엽을 여러 次例 만났던 미국의 전문가 셀릭 해리슨(Selig Harrison)에 의하면, 황장엽은 북(조선)에서 “존경받는 인물”이기는 하지만, 실세 정치가는 아니며, 당서열로 따져도 25위 이내가 아니라, 65위 또는 70위 이내라고 한다. 그는 1994년 10월 쿠바, 우루과이, 브라질을 방문했고, 1995년 11월에는 영국과 프랑스를, 1996년 1월 러시아를, 6월에는 베트남을 방문했다. 베트남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베이징에 들렸던 황장엽이 황장엽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던 정체 불명의 남(한국)인사 A와 만난 것은 1996년 7월 3일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 때의 대면이 처음인 것으로 나타나있는데, 황장엽은 A에게 인사하면서, “…(dr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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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언론들은 황장엽 사건을 보도하면서 한결같이 “주체사상의 종언”을 상징하는 사건이라느니, “권력 투쟁의 산물”이라느니, “북한 지도 체제의 ...
외부 언론들은 황장엽 사건을 보도하면서 한결같이 “주체사상의 종언”을 상징하는 사건이라느니, “권력 투쟁의 산물”이라느니, “북한 지도 체제의 내부 균열”을 반증한다느니 하는 이른바 ‘북한 문제 전문가’들의 견해를 여과없이 대서 특필했다. 이를테면 『한겨레』 1997년 2월 13일자 사설과 관련기사들을 참조하라.
『워싱턴포스트』는 “그의 망명을 비유하자면 소련에서 공산주의의 시조인 맑스가 탈출한 것과 같으며, 자유주의의 신봉자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을 버리고 망명한 것과 같다” Washington Post 1997년 2월 13일자.
고 썼다.
1980년대 의원 외교로 활동했던 경험과 주체사상 theory 가라는 명성을 가지고 황장엽은 1993년에 당 국제담당 비서를 맡은 뒤에 망명 요청 이전까지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으로, 또는 학자의 신분으로 학술 교류차 외국 방문을 자주하였다. 그러나 황장엽은 각국 언론들이 지금 부각시키고 있는 것처럼 ‘주체사상의 창시자’도 ‘북(조선) 최고의 사상theory 가’도 아니고, ‘권력의 point적인 인물’, ‘외교의 point’도 아닐것이다. 남(한국)의 한 언론은 황장엽을 가리켜 “그저 명예 퇴직의 날을 기다리는 한 원로 정치학자였을 뿐이다” 『중앙일보』 1997년 2월 14일자.
고 평하기도 했다.